도자기 수업

조선 사발 tea bowl 이야기

브라이어 2022. 10. 28. 13:53
반응형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밥그릇 모양의 볼 형태를 사발이라고 명칭 합니다. 조선의 사발은 일본이 열광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국보급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국보급으로 정해진 조선 사발이 일본 대덕사 고봉암에서 몇 겹의 상자 안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일명 이도(정호) 다완이라고 일본인들이 칭하여 부릅니다. 정말 우리가 발견하지 못하는 조선 사발의 미학을 일본 이들이 먼저 알아주는 것이 씁쓸하면서도 조선의 사발에 자부심이 생깁니다.

 

 

 

조선 사발 막사발

 

일본인이 사랑한 조선의 사발은 조선에서 사용했던 밥사발로 보이는 사발의 일종이라고 추측합니다. 막사발의 용어는 일본인들이 지어낸 이름이고,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하얀 백 사기를 막사발이라고 신한균 사기장이 표현하였습니다. 사발과 막사발의 차이는 유약의 색깔과 굽 모양의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신한균 사기장의 책에서는 조선 사발의 굽은 우뚝 서있지만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백 사기는 기벽과 굽의 높이가 매우 낮습니다. 일본인들이 사랑하는 조선의 사발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하얀 백 사기가 아니라 구연부가 잘 펼쳐지고, 굽의 높이가 우뚝 선 위풍당당한 사발입니다. 사발의 점토는 고운 백자토도 아닌 사토沙土가 섞인 거친 태토입니다. 조선시대 서민들이 질 좋은 백자토를 사용할 수 없게 법으로 금지하였기 때문에 고운 백자 토로 백자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조선 사발 정호 다완

 

이도 기자에몬 사발(정호 다완), 16세기 후반, 일본 다이도쿠지(대덕사), 고호안 소장

조선의 사발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는 몇백년의 조선의 미감을 품은 사발입니다. 

 

이도(정호) 기자에몬 다완

 

 

일본인들에게 조선의 분청자와 백자 사랑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중 조선의 옛 분청 사발을 일본에서는 국보로 지정하고, 천황도 조선 사발에 절을 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도 다완은 조선에서 만들어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국보로 지정된 조선의 사발입니다. 일본 대덕사에서 국보로 소장하고 있는 조선의 사발을 이도 기자에몬 다완이라고 칭하며, 굽은 높은 편이고, 표면에는 태 토질 때문에 공기구멍이 있고, 빙열이 잔잔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신한균 사기장이 일본 대덕사에서 기자에몬 다완의 만남을 촬영한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조선의 막사발>이라는 영상이었는데 제목에 막사발로 표현하게 한 것을 후회하셨다고 하네요. 이 사발을 드는 순간 몇 백 년의 역사의 혼을 마주하는 느낌이 대단히 숙연해졌을 거라 생각이 들어요. 몇 년 전에 <조선의 막사발> 영상을 본 적이 있어요. 나무 상자 속의 보자기에서 꺼내고, 풀고, 꺼내고, 풀기를 몇 번의 반복 끝에 영상으로 조선의 사발을 마주하는 순간 몇 백 년의 조선 사기장들의 울림이 가슴으로 뜨겁게 다가왔습니다. 무게는 가볍고, 형태는 높은 굽다리에 약간 기울어져 있어 순박함이 묻어 있었지만, 조선의 사기장들의 위풍당당함의 에너지는 그대로 느껴지는 영상이었습니다. 이 모든 모습이 슬퍼서 나를 일깨우고 혼미한 마음을 추슬렀던 영상이었습니다. <조선의 막사발> 영상 한 번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조선의 분청 사발

 

분청 사발에 앞서 분청자 또는 분청사기의 의미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고려 말에 왜구 침략 및 제작 어려움으로 청자가 쇠퇴하고, 분청자가 제작되어 조선 15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분청자(분청사기)의 태토 질은 떨어지지만, 청자의 재료와 흙의 성분은 같습니다. 분청자 유약은 투명유라고 생각하겠지만, 연한 녹색을 띤 청자유와 비슷하다는 것을 박물관에 있는 분청자(분청사기)를 유심히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분청회 청사기'의 줄임말인 '분청사기'의 명칭을 붙이기도 하고, 불리고 있습니다. 거칠고 사토가 들어간 점토 기물에 하얀 분장기법이 들어간 것을 분청자(분청사기)라고 합니다. 백토 물을 붓으로 바르면 귀얄 기법, 백토 물에 담그면 덤벙 기법으로 나눕니다.

 

조선의 분청자는 찻사발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일본에서는 조선의 찻사발은 고귀한 물건으로 대접을 받았을 정도로 위엄이 있었습니다. 15세기 후반 - 16세기의 일본은 전쟁과 사회 혼란을 극복하고자 다도를 즐기며 마음의 평안을 찾고, 다도가 유행하고 발전하였습니다. 일본의 센 리큐는 16세기 후반에 일본에 다도법을 확립시켰고, 조선의 분청 사발을 사용하여 많은 일본 다인들이 조선 분청 사발에 매료되었다고 합니다. 분청 사발이 갖는 유색이 아마도 소박함에서 나오는 차분함과 차 본연의 색을 오롯이 느끼기에는 최상의 사발이 아녔던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일본은 조선 사발의 미감에 대한 지난 친 사랑과 과욕이 임진왜란 발단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전쟁으로 조선 사기장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찻사발을 제작하였다고 하지만, 그토록 일본이 열광하는 조선의 분청 사발이었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들의 품에서 만들어지는 조선 사기장들의 의식의 흐름대로 물레질하며 자유로운 미감과 에너지가 오롯이 사발에 스며들여졌을까라는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명품을 만들어 주신 조선 사기장들의 얼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조선16세기전반 분청자사발

 

분청자덤벙완, 16세기 전반, 일본개인 소장
사진의 분청자덤벙완은 백토 덤벙분장이 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 오히려 사발의 가치를 높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반응형